여기서 박칼린은 전남편을 만나게 되었죠.
우선 박칼린 전남편 연극인 유모씨인데, 원래 성격은 별문제가 없는데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하여 이혼을 했다고 했었죠.
실제로 부산 레퍼토리시스템의 창단 10주년 기념 멕베스 공연에 박칼린과 유흘상이 함께 참여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관계가 별로 나쁜 것 같지는 않네요.
아무튼 이렇게 박칼린은 연극배우로 잠깐 활동을 하다가 결국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큰 성공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당시 한국 뮤지컬계는 막 시작하는 단계였고, 따라서 젊은 나이에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이었죠.
우선 박칼린은 부산에서 연극배우로 활동을 하다가 서울의 대학로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1987년 연극 '불의 가면'에서 처음으로 음악감독을 맡게 됩니다.
당시 연극에 음악을 접하는 것은 뮤지컬처럼 큰 역할이 아니었고, 또한 우리나라의 가난한 연극판의 경우에 전문적인 음악인을 쓸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극배우중에 미국 대학과 서울대 석사 출신의 음악학도가 있다?
자연스럽게 박칼린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게다가 박칼린은 자신이 맡은 연극 음악 감독 역할을 훌륭하게 해냅니다. 이 덕분에 점차 그녀의 역할은 더 커져갔죠.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 1호 창작뮤지컬' 명성황후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기사로 보도가 되기도 하는데, 사실 박칼린으로서는 큰 감흥이 없었던 것 같네요.
박칼린: "(대한민국 음악 뮤지컬 감독 1호라는 타이틀은) 큰 의미는 없어요. 이미 그전 작품에서도 음악 감독을 하고 있었지만, 정식 명칭으로 타이틀이 생긴 거고, 사람들한테 그렇게 알려진 것뿐이죠."
결국 박칼린은 이십대 초반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또한 시대적인 흐름을 잘 타고 나면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죠.
우리나라에는 박칼린때문에, 좀 독특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바로 초창기 유명한 뮤지컬 감독들은 전부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권이 강한 해외에서도, 한국의 상황은 굉장히 이례적이라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은 바로 박칼린때문이었죠.
박칼린: "‘명성황후’ 때 내가 20대였는데, 자존심 때문에 20대 여자 밑으로 들어가서 배울 남자들이 없었다."
박칼린: "그래서 여자들이 줄을 이으면서 남자는 뮤지컬 음악감독 안 하는 것 같은 풍토가 돼버렸다. 물론 최근에는 바뀌었지만."
박칼린이 바로 뮤지컬 음악감독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죠.
박칼린: "당시에는 뮤지컬 배우들이 노래 레슨 받는 것도 없었다. 그냥 끼 있고 노래 좀 한다 싶으면 뮤지컬 배우 하는 줄 알던 시절이다."
박칼린: "그때 오디션 제도도 처음 만들자고 제안했다. 나이 많은 배우들이 ‘어린 여자 앞에서 오디션 보라니 말이 되냐’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박칼린: "초기부터 뮤지컬 배우들에게 보컬 레슨 받아라, 춤도 배워라, 공부해라, 라고 하도 닦달하고 다녀서 내가 마녀라고 불렸다."
박칼린: "한동안 뮤지컬계에서 난 ‘필요하기는 하지만, 껄끄럽고, 그렇다고 자를 수도 없는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박칼린: "미국에서 잘살고 있던 사람이 타국(한국)에 와서 남자들이 판치는 세계에 뛰어들어 쌔(혀)빠지게 때론 쓰러질 만큼 열심히 작업했다. 다른 곳에 한눈 팔지 않고 하루 16∼18시간을 맡고 있는 작품에 쏟아부었다."
박칼린을 자를 수가 없었다... 그만큼 박칼린의 실력이 좋았고, 또한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네요.
이렇게 1990년대에 뮤지컬계에서 박칼린은 명성과 실력을 쌓게 되었죠.
그리고 2010년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여, 박칼린이라는 이름은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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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중들은 박칼린의 뮤지컬 지휘 실력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독특한 리더십에 더 열광을 했죠.
어떻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모아서 합창단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로 잘 이끌 수 있는지...
이 이유는 박칼린의 가치관에서 잘 비롯됩니다.
박칼린: "뮤지컬 면접에서 긴장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심사위원이에요. 리더가 잘못 뽑으면 자기만 ‘생고생’하게 되는 거죠."
박칼린: "실제로 춤이 안 되는 사람이 오디션만 잘 봐서 왔는데, 정작 현장에서 춤 역할 제대로 못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건 그 사람 잘못이 아니라, 처음부터 캐스팅이 잘못된 것이죠."
박칼린: "오디션 보러 온 사람 중에 ‘얘, 얘, 얘, 얘’ 뽑으면 이 작품 되겠구나! 순간 결정을 하는 것이 바로 그 심사위원의 실력이죠."
박칼린: "그리고 그런 오디션 과정을 거친 다음에 뽑은 사람은 완전히 믿어야하고요."
오디션이나 면접 등에서 보통 지원자들이 바짝 긴장하는 반면에, 심사위원들은 아주 느긋하게 지원자들을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박칼린의 생각은 전혀 반대였네요.
이런 생각과 한번 뽑은 사람은 끝까지 믿는 박칼린의 모습에서, 우리 대중들이 박칼린식 리더쉽에 열광한 것이 아닐까 하네요.
덧붙여 박칼린의 신장에 대하여 한번 짚어봅니다.
어쩌면 박칼린은 현재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박칼린: "2002년 피로때문에 병원을 갔다가 양쪽 신장이 모두 손상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신장이식을 권고받았지만, 평생 투석해야 한다는 말에 치료를 포기했다."
박칼린: "신장이 안 좋다. 한번 안 좋아진 신장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아픈 것을 잊고 산다."
박칼린: "양쪽 신장에 다 문제가 있어서
앞으로 4, 5년 정도 살 수 있다고 한다." (2010년 박칼린 인터뷰에서)
그런데 박칼린은 본인의 신장 문제를 굉장히 덤덤하게 받아들입니다.
박칼린: "병원에서는 신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투석도 해야 된다고 해요. 하지만 안 할 거예요. 아휴, 차라리 그냥. 그동안 잘 살았으니까. 뭐."
박칼린: "만약 5분 뒤에 죽는다고 해도 후회가 없어요. 진짜 저는 후회 없이 살았어요. 남들이 나만큼만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쟁이 없을 것 같아요."
박칼린: "내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다 뿌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가도 여한이 없어요."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이라...
확실히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박칼린답네요.
게다가 이 인터뷰가 지난 2010년때의 일인데, 당시 불과 4,5년으로 시한부의 삶을 의미했는데, 현재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는 이유는, 박칼린 특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에너지 넘치는 삶 덕분이 아닐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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