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최은희 러브 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신상옥과 최은희 부부의 일생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습니다.
먼저 최은희의 경우는 북한으로부터 2번 납치가 되었고, 신상옥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더불어 박정희도 증오하고, 김대중과의 관계도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보면 한국의 근현대사의 비극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네요.
신상옥 최은희 부부 사진 젊은 시절
먼저 영화배우 최은희(본명 최경순)는 1926년 11월 20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납니다(최은희 고향). 올해 99살이죠(최은희 나이).
(최은희 종교 천주교)
(최은희 학력 학벌) 경성 기예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최은희 프로필 및 경력)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고,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를 통해 영화 배우로 데뷔합니다.
그리고 밤의 태양, 젊은 그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등을 통해서 5,60년대의 대표적인 여배우로 성장합니다.
최은희가 처음 영화배우로 등장한 작품 '새로운 맹서'(1947년)에서 최은희는 첫번째 남편 김학성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김학성은 촬영기사였죠(최은희 남편 직업, 최은희 첫남편).
최은희: "얼떨결에 어린 나이에 동거를 했고, 나이가 13살이나 차이가 났어요."
1954년 주한 미군 위문 공연을 온 마릴린 먼로와 함께 찍은 사진
하지만 둘은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지는 않고 결혼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지고 최은희가 납북되었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둘은 자연스럽게 결별하게 됩니다(만약 사실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혼이라고 할 수 있죠.)
북한 인민군에게 납치된 최은희는 청천강 부근까지 끌려갔다가 구생일생으로 탈출하게 되는데, 이때가 최은희의 1차 납치 사건입니다.
최은희: "영화 ‘사나이의 길’을 촬영하기 위해 목포에 갔다가 6·25 소식을 들었어요.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왔는데,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어요. 며칠 후에 쌀을 사러 거리에 나갔다가 인민군복을 입은 북한 배우 심영을 만났죠."
최은희: "제가 일제 때부터 연극, 영화를 했으니까 심영이 저를 알아봤어요. 북한 내무성 소속의 경비대 합주단에서 일해야 한다며 저를 데려가더군요. 가보니 명동성당에 200명의 예술인이 합숙하고 있었어요. 9·28 수복 후에 인민군이 후퇴할 때 평양 근교 청천강 옆 순천쯤에서 탈출했지요."
최은희: "당시 악극단 멤버 6명이 탈주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중에 배우 엄앵란의 삼촌인 엄토미(재즈 연주자)씨가 있었어요. 저도 끼워 달라고 간청했지요. 그 길로 도망쳐서 청천강을 건넜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수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남자들이 옆에서 제 팔을 잡고 배낭을 머리에 이고 동동 떠내려 갔지요. 그 와중에도 이 장면을 전쟁 영화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최은희 젊은 시절 과거 사진(최은희 리즈 시절)
이때 최은희가 인민군들로부터 집단 윤간을 당했다는 풍문이 돌게 됩니다(나중에 불임과 연관해서 소문이 그럴 듯하게 퍼짐). 이런 소문은 최은희의 인간적인 자긍심을 훼손하고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힙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건의 실체를 고백하죠.
최은희: "사실 성폭행을 당한 것은 맞아요. 그런데 인민군이 아니라 국군의 헌병대장이었죠. 권총으로 정수리를 겨누고 성폭행을..."
사실 이것이 전쟁의 실상입니다.
적군은 나쁜 놈이고, 아군은 착한 놈이라는 이분법이 맞지 않죠.
전쟁터에서 목숨걸고 싸우는 군인도 있지만, 이렇게 뒤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놈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더 참혹한 것이죠.
아무튼 그렇게 인민군으로부터 탈출한 최은희는 국군 위문공연을 하면서 국군의 사기를 높였고, 그러다가 남편 신상옥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최은희는 이미 인기 스타였고, 남편 신상옥은 신인 감독이었죠.
영화감독 신상옥(신태익)은 1926년 10월 18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납니다(단, 신상옥의 생일이 1920년 혹은 1925년이라는 설이 있음)(신상옥 고향). 그리고 2006년 4월 11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사망하게 됩니다.
(신상옥 학력 학벌) 함경북도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도쿄미술전문학교 중퇴
(신상옥 프로필) 1952년에 16mm 영화인 《악야》로 본격적인 영화 감독으로 데뷔
원래 1940년대말 신상옥은 영화배우 최은희의 팬이었다가, 1952년 영화 코리아를 촬영하면서 처음 만났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합니다. 최은희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이례적인 선택으로 세간의 큰 관심을 받게 됩니다(최은희의 이혼과 재혼).
그러자 전남편 김학성이 분개하여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를 합니다(우리나라 연예계 제 1호 간통죄 재판).
하지만 최은희와 김학성은 사실혼 관계였고 이미 깨어진 뒤였기에, 간통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최은희: "전남편이 우리를 간통죄로 고소했어요. 그 사람과 혼인신고를 한 것도 아닌데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고소한 거죠. 법정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판결이 났어요."
결국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고, 최은희와 신상옥은 1954년 3월 재혼하게 됩니다(따로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음)(신상옥 최은희 배우자).
이후 신상옥은 최은희와 많은 작품을 하게 됩니다. 특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큰 관심을 모았고,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이 등은 한국 영화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또한 심훈의 장편소설을 각색한 영화 '상록수'는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역시 신상옥과 최은희의 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나중에 납치의 빌미가 되었죠.)
그런데 최은희는 임신이 불가능한 체질이었습니다(최은희 불임). 결국 두 사람은 양자 신정균(이름)과 양녀 신명희를 들입니다.
그리고 신상옥이 나중에 오수미와 외도를 하면서 아들 신상균과 신승리를 두게 됩니다. 이렇게 신상옥의 자녀는 총 4명이 되죠(신상옥 자녀 자식, 신상옥 아들)
신상옥 오수미 사진
신상옥의 불륜은 1973년 시작되었고, 결국 1976년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이혼하게 됩니다(신상옥 최은희 이혼사유, 이혼이유).
최은희: "가망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식은 친부모 밑에서 커야죠. 그래서 내가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신감독이 못하겠다고 하는 걸 내가 우겨서 이혼을 했죠."
오수미는 1950년 10월 3일생입니다(오수미 고향 제주). 1970년 영화 '어느 소녀의 고백'으로 데뷔했고, 당시 이십대 초반이었죠.
결국 최은희는 신상옥과 이혼하고 안양예술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이 학교는 신상옥이 세운 학교로 신상옥이 당시 이사장이었죠. 즉, 최은희가 비록 이혼은 했지만, 전남편 신상옥과는 거리감있는 우정을 유지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여배우 오수미 사진, 당시 막 컬러 TV가 보급되었기에, 컬러 사진도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신상옥 최은희의 애정사와는 별개로, 당시 신상옥은 박정희 정권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영화 상록수때는 밀월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전태일 열사의 분신(1970년 11월 13일)을 두고 신상옥과 박정희는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됩니다.
신상옥이 이 사건을 영화화하겠다고 나서자, 박정희 정권은 신감독의 영화제작 영업감찰(신필름)을 박탈하고, 그 이후에도 신상옥의 영화 제작을 여러모로 방해하게 되죠.
(좀 더 구체적인 사건은 1975년 영화 '장미와 들개' 사건이었음. 오수미가 주연한 영화인데, 표현의 자유를 중시한 신상옥이 검열에서 짤린 장면(여배우의 상반신 노출 장면)을 일부러 예고편에 삽입을 함. 당시 문공부에서 신필름의 영화사 등록을 취소해버렸고, 신상옥은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며, 신상옥이 남산에 끌려갔다가 판결이 나기 하루전 행정소송을 취하함)
어쨌든 이런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사정을 전해 들은 김정일이 먼저 최은희의 납치를 지시해서, 1978년 1월 14일 최은희가 홍콩에서 납치됩니다. 당시 최은희가 교장이었던 안양예고의 재정 상태가 나빴는데, 홍콩 재벌을 가장한 북한 공작원의 꼬임에 넘어가서 홍콩으로 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죠.
그리고 신상옥은 이혼한 전처이지만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최은희를 찾기 위하여 홍콩을 샅샅이 뒤지다가 1978년 7월 18일 납북됩니다(신상옥 최은희 납치사건).
당시 신상옥은 오수미와 재혼한 상태였는데, 오수미는 결국 신상옥이 북한에 있던 1986년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을 하게 되죠.
어쨌든 북한으로 납치된 신상옥과 최은희는 김정일의 후원 아래에 영화를 찍기 시작합니다. 총 17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탈출기>, <소금>, <불가사리>, <돌아오지 않은 밀사> 등이 외부에 잘 알려진 영화들입니다. 특히 구한말 고종황제의 밀사로 화란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할복자살한 이준 열사를 주제로 제작한 <돌아오지 않은 밀사>는 1984년에 체코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신상옥이 특별감독상을 수상하였고, <소금>으로 1985년 모스코 영화제에서 최은희가 여우주연상을 받게 됩니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와 김정일 사진
두 사람의 영화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 작품들이고, 또한 북한으로서는 당시 팽팽하게 진행되던 남북 체제 대결에서 더할 나위없는 좋은 선전도구로 사용됩니다. 남한의 대스타였던 신상옥과 최은희가 북한으로 자진 입북(북한의 주장)해서,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었으니까요.
최은희: "저의 납북으로 인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이들일 거예요. (신상옥과) 이혼할 때도 양부모란 것을 몰랐던 애들이 납치사건 이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사춘기 아이들이 혼란스러웠겠죠.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북한에 있으면서도 애들 이름 부르며 많이 울었어요. 큰딸도 제가 북한에 있을 때 혼자 시집을 갔는데, 많이 울었다고 하더군요."
원래 신상옥과 최은희에 대한 북한 정권의 감시는 매우 엄밀했지만, 점차 소홀해지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태도때문이었죠.
예를 들어서 1985년 런던 영화제에 신상옥과 최은희가 참석하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영화배우 남궁원과 김지미 등도 참석합니다.
김지미: "감독님(신상옥)과 선배님(최은희)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했는데, 두 분이 어찌나 쌀쌀맞게 대했는지 너무 섭섭하여 울었다."
김지미: "북에서의 생활이 어떠냐고 질문하자 그 두 분이,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배려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영화제작활동도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당의 지원을 받고 있고 최대한으로 자유분방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서 북조선 공화국 밖에 없다”고 말하더라."
사실 박정희로부터 억압을 받던 신상옥이었기에,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이 그럴 듯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두 사람이 탈출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죠.
이런 두 사람의 행동 덕에 북한 감시원들의 감시는 점차 느슨해졌고, 마침내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1986년 3월 13일 영화 촬영과 관련해서 오스트리아 빈에 방문하다가 미국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납북된지 9년 만의 탈출이었죠.
하지만 여기서 두가지 짚을 점이 있습니다.
신상옥은 탈출하기 전에 일본 교도통신 순회 특파원인 에노키 아키라와 자신의 친구인 김인환(함경북도 경성고보 동기동창, 당시 미국으로 이민가서 살고 있었음)을 적극 이용합니다.
그리고 망명지로 한국이 아니라 미국을 선택하는데, 그 이유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신상옥: "남한에는 북한의 간첩들이 우글거리고 있기에 위험해서 연락을 취하면 안된다."
1980년대는 체제 경쟁이 치열하던 때로, 북한의 체제가 우위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죠. 아마 신상옥이 중앙정보부나 한국의 외교관들에게 연락을 취했다면 틀림없이 도중에 기밀이 새어나갔을 겁니다.
신상옥의 냉철한 판단이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죠.
또한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미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한 뒤에도 결코 남한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 말이었는데, 신상옥의 군사 정권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죠.
신상옥 부부 탈출관 관련된 CIA 전문가: "신상옥과 최은희의 북한탈출사건이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일면뉴스로 도배를 하였다. 특히 한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대형뉴스로 떴고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주기를 애원하였다. 그들의 형제들과 특히 양자 신정균과 양녀 신명희는 애절한 편지를 써서 그들이 하루속히 서울로 와달라고 호소하였다. 또 한국정부에서는 국가안전기획부 (안기부) 2차장 (국제담당) 이학봉과 제3국 부국장과 수사단장을 미국에 파견하여 신감독과 최여사를 접촉하고 한국으로 가자고 설득하였으나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사실 일각에서는 최은희는 강제로 납북된 것이 맞지만, 신상옥은 영화 제작과 전부인을 보기 위하여 자진 입북을 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고, 신상옥이 이것을 겁내서 한국으로 가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결국 정권이 바뀌고, 노태우 정권은 신상옥의 절친한 친구 강원룡 목사(둘은 동향 친구임)을 동원해서 신상옥 부부를 서울로 초청합니다(1989년 5월).
그 이후 신상옥은 1990년 북한의 칼기 테러 사건을 영화화한 '마유미'를 제작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1994년에는 영화 '증발'을 제작하는데, 누가 보더라도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영화였습니다.
(영화 내용) 중앙정보부에서 여대생 강리나를 고문하고 강간하는 장면이 나오죠. 북한의 위협을 이용해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위정자들의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625때 최은희에 대한 국군 헌병대장의 강간도 그렇지만, 이런 에피소드 역시 절대 권력의 나쁜 점이죠. 아마 이들은 이상과 가치는 상관없고, 단지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 재산을 늘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상옥은 흥남부두 철수를 주제로 하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하지만, (정권 교체 후) 김대중 정권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을 하던 박지원이 '북한을 자극하는 작품'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영화 제작을 좌절시킵니다.
결국 신상옥은 이 작품을 만들지 못하죠.
과연 이런 이유로 정부에서 영화 제작을 막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이네요.
신상옥이 2006년 사망하면서, 이 작품은 영영 제작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신상옥의 전처 오수미(전부인)의 인생 역시 그리 평탄치는 않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실종되었다가 북한에 나타나서 영화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당시에는 신상옥이 자진입북했다고 북한이 선전하고 있었을 때였죠). 함께 살던 남편이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전처를 찾아 북한으로 자진입북했다는 주장을 들었다면, 아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다.(신상옥 전부인).
이런 정신적인 타격때문인지, 오수미는 이후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이 되기도 하는 등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6년 사진 작가 김중만과 재혼하지만, 곧 이혼하고, 1992년 미국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혹자는 음모설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오수미의 지인이 몰고 가던 차가 다른 차와 사고를 일으킨 것이죠(오수미 사망원인, 오수미사망이유).
이때 최은희가 달려가서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게 됩니다.
최은희: "죽으면 모두 끝인 걸, 뭐. 용서하고 말 게 뭐 있어? 한때는 괘씸하고 서운하고 그랬죠. 내가 대선배인데, 너무 무시당한 것 같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지금 뒤돌아 생각해보면 걔도 하나의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는 생각…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잖아요?"
최은희: "수미와는 악연이지만, 생각하면 참 안됐어요. 아이들과 함께 수미를 위해 미사를 드리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장해줘 너무 고마워요. 상균이는 미국 국무성에서 일해요.그 밑의 승리는 서울에서 잘 살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정균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감독으로 일하고 있지요. 착한 큰딸 명임이는 청주에서 살아요."
그리고 최은희는 양자와 양딸은 물론이고 신상옥과 오수미 사이에 난 아이들 두명까지 불러들여 같이 키웁니다.
최은희: "나는 아이를 못 낳았지마는 지금 내 아이들이 사남매예요. 신 감독과 입양한 두 명, 오수미와 신 감독 사이에 두 명. 신 감독, 오수미 둘 다 죽었고 결국 모두 내 아이들로 남았죠. 이제 증손주까지 해서 전 가족이 다 모이면 스무 명쯤 돼요. 오수미가 낳은 애들이 참 착하고 유순해요. 막내딸 승리는 연기를 하려고 애쓰다가 지금은 딸을 둘씩이나 낳고 가정생활을 잘하고 있죠. 요즘은 그게 제일 기분이 좋아, 하하. 내가 평생을 가정과 일을 왔다갔다하면서 살아서 그런지 승리는 (배우를) 안 했으면 싶더라고. 이 아이들은 모두 내가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건 우리 다섯이니까 이렇게 한 가족으로 의지하고 사는 것 아니겠어요?"
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을 살았던 신상옥 최은희 오수미의 이야기입니다.
최은희는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지만, 모두를 자신의 자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수미에 대한 미움과 증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것이죠.
죽을 때는 재산도 가져가지 못하지만, 미움과 증오 역시 저 세상으로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젊은 사람에게 이런 진리를 강요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모두들 죽기 전에는 미움과 증오로부터 벗어나는 인생이 되었으면 하네요. 그것이 본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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